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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화. 러시아 여자와 결혼해보니
    슬기로운 결혼생활 2026. 5. 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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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신기하게,
    행복했다

    국제결혼의 현실, 그리고 평범하고 따뜻한 하루에 대하여

    프로포즈는 생각보다 단순하게 했다.

    거창한 계획이 없었다. 레스토랑 통째로 빌리거나, 하늘에 현수막을 띄우거나, 친구들을 숨겨뒀다가 깜짝 등장시키거나. 그런 연출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고, 그녀 스타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프로포즈를 거창하게 해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음)

    그냥 집 앞에서 했다.
    꽃을 들고, 반지를 꺼내고, 무릎을 꿇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까지 가는 길이 더 떨렸다. 꽃 들고 걸어가면서 머릿속으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아니, 싫다고 할 리 없는데. 그래도 만에 하나.

    그렇게 혼자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는데, 막상 그녀 앞에 서는 순간 이상하게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이 있었다. 이 사람이 맞다는 것. 지금이 맞다는 것. 그냥 온몸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좋아했다.
    눈이 빨개지는 걸 보면서, 나도 뭔가 울컥했다.
    티는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마 표정이 다 보였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약혼했다. 그리고 결혼했다. 두 번을.

    🇷🇺 러시아 · ZAGS

    행정기관 앞에서 서류에 서명하고, 조용하고 단출하게. 우리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 한국 · 스몰웨딩

    가까운 사람들만 불렀다. 드레스를 입은 아내가 아름다웠다. 잠깐 멍하니 봤다.

    "왜 그렇게 봐?" 아내가 물었다. "예뻐서." 그랬더니 쑥스러워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로 부부가 됐다.

    결혼식

    크게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 분위기가 좋았다

    솔직히 결혼 전까지는 국제결혼이 특별히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 좋아하고, 맞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언어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문화가 다를 뿐이지.

    완전히 틀렸다.

    막상 같이 살아보니 생각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이 훨씬 많았다. 마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은 충분했다. 문제는 생활이었다.

    가장 큰 건 역시 언어였다. 아내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한국에 왔다. 그게 일상에서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는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 잘 모른다.

    은행에 가면 내가 통역해야 했다.
    병원에 가면 내가 증상을 대신 설명해야 했다.
    휴대폰 개통, 동사무소 서류, 배달앱, 교통카드 충전.

    한국 사람들에겐 숨 쉬듯 당연한 것들이
    아내에게는 전부 새로운 세계였다.

    솔직히 힘들기도 했다. 퇴근하고 피곤한 날에도 뭔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게 쌓이면 가끔 지쳤다. 근데 이상하게 짜증은 안 났다.

    오히려 그런 순간들을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진짜 가족이구나.

    짐을 나눠 드는 게 가족이라는 걸, 그때 좀 더 구체적으로 느꼈다.

    일상

    짐을 나눠 드는 게 가족이라는 걸, 그때 좀 더 구체적으로 느꼈다

    한국 생활 자체에 적응하는 건 생각보다 빨랐다. 아내 말로는 러시아보다 한국 시스템이 훨씬 편하다고 했다. 배달이 빠른 것도 신기해했고, 카드 하나로 버스 지하철 다 된다는 것도 좋아했다. 생활 인프라는 빨리 적응했다. 문화는 좀 달랐다.

    🌶️

    매운 음식은 처음엔 힘들어했다. 불닭볶음면 한 젓가락에 표정이 굳었다. 그 뒤로 빨간 음식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

    🥬

    김치는 의외로 잘 먹었다. 냄새를 처음 맡을 때는 좀 당황했지만, 막상 먹어보니 나쁘지 않다고.

    🍙

    김밥은 처음 먹었을 때부터 좋아했다. 재료가 다 들어가 있는데 복잡하지 않다는 게 좋다고. 지금도 편의점 가면 꼭 하나 집는다.

    🍲

    소고기국밥도 좋아한다. 처음엔 낯설었는데, 한 번 먹어보고 나서 겨울만 되면 찾는다. 따뜻하고 진한 국물이 체질에 맞는 것 같다.

    김밥 한국 음식

    지금도 편의점 가면 꼭 김밥 하나 집는다

    웃겼던 건 한국 욕은 엄청 빨리 배웠다는 거다. 어느 날 갑자기 장난치면서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 실제 대화
    아내"씨발 개새끼야~" 😄
    → 순간 나 진짜 멈췄다. 화난 거야? 장난이야?

    표정을 봤더니 웃고 있었다.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다. 어디서 배운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물어봤더니 그냥 들었다고 했다. 어디서? 잘 모르겠다고. 아마 유튜브였을 거다.

    그 뒤로 가끔 예상치 못한 한국어가 튀어나오는데, 높은 확률로 욕이다. 나쁜 말이니까 쓰면 안 된다고 했더니,

    "근데 너도 쓰잖아"
    반박 불가였다.

    물론 힘든 일도 있었다. 한 번은 진짜 이혼할 뻔했다.

    아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 개인적인 문제로 약속을 어긴 일이 있었다. 서로 감정이 많이 상했다. 오래 쌓아온 신뢰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냥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뭔가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

    며칠 동안 연락이 거의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짧았고, 영상통화를 해도 어색했다.
    분명히 화면 속에 얼굴이 보이는데,
    이상하게 멀게 느껴지는 그 느낌.

    거리는 원래도 멀었는데, 마음까지 멀어지니까 더 막막했다.

    그런데 결국 대화로 풀었다. 어느 날 서로 마음속에 있는 걸 다 꺼냈다. 번역기 켜놓고, 길게. 나는 왜 그랬는지 설명했고, 그녀는 어떤 게 상처였는지 말했다. 그리고 풀렸다.

    신기하게 우리는 싸움이 오래 가지 않는다. 서로 잘못한 걸 인정하고, 왜 그랬는지 설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하고, 끝낸다. 감정을 오래 끌고 가지 않는다.

    번역기로 싸운 경험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싸우는 방식이 관계를 만드는 것 같다.

    대화와 화해

    어떻게 부딪히느냐가, 결국 얼마나 오래 가느냐를 결정하는 것 같다

    결혼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건 하나였다.

    러시아 여자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라는 거.

    인터넷에 러시아 여성 관련 이야기를 찾아보면 항상 비슷한 말들이 나온다. 엄청 가정적이다, 남편을 극진히 챙긴다, 순종적이다. 마치 어떤 공통된 특성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솔직히 그런 건 사람마다 다 다르다.

    러시아 여성도 어떤 사람은 문란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어떤 사람은 따뜻하고, 어떤 사람은 차갑다.
    한국 사람도 다 다르듯이.

    국적이 사람의 성격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이 다 다른 거다.

    내가 만난 아내는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게 러시아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녀가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어설픈 영어로 말해도 끝까지 들어줬고, 번역기를 뒤지는 동안 기다려줬고, 내 감정을 자기 감정보다 먼저 챙겨줬다.

    국적이 아니라, 사람.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거창한 이벤트가 있는 날보다, 아무것도 없는 날이 훨씬 많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청소가 돼 있고 저녁 준비가 돼 있다. 같이 밥 먹고, 설거지하고, 소파에 앉아서 각자 핸드폰 보다가, 슬슬 졸리면 자러 간다.

    그게 우리의 보통 하루다.

    뭔가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같이 있으면 그냥 좋았다.
    말이 많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그런 사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편한 사람.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걸, 살면서 알게 됐다.

    평범한 저녁

    아무것도 없는 날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그게 좋았다

    예상대로 힘들었다.
    언어 문제, 문화 차이, 멀리 있는 가족들, 비자 문제, 전쟁으로 복잡해진 이런저런 것들.
    국제결혼은 낭만적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아주 현실적이고 때로는 지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신기하게 행복했다.

    힘든 날에도 집에 오면 그녀가 있었고,
    지친 날에도 같이 밥 먹으면 좀 나아졌고,
    아무 말 없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어도 그게 좋았다.

    그때 러시아행 비행기를 끊지 않았더라면.
    아무 생각 없이 그 카페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용기인지 무모함인지도 모를 그 한 마디를 건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이 평범하고 따뜻한 하루가 없었을 거다.

    어떤 선택이 인생을 바꾸는지는,
    그 순간엔 절대 모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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