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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화. 카페에서 말을 걸었다
    슬기로운 결혼생활 2026. 5. 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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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기 연애의 시작

    말이 안 통해도, 마음은 전달됐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에게 걸어가는 그 몇 초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몇 초였다.

    발은 움직이고 있는데 머릿속은 반대로 달리고 있었다.

    괜히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아니, 애초에 외국인 여자한테 말 거는 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러시아잖아.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렸을 거다. 적당한 자리 찾아서 혼자 커피 시키고, 그냥 창밖 보다가 나왔을 거다. 그게 내 방식이었다.

    근데 그날은 달랐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온몸이 알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없다는 걸.

    그래서 번역기를 켰다. 손이 약간 떨렸던 건 안 비밀이다.

    카페 문

    발은 움직이고 있는데 머릿속은 반대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아는 러시아어는 몇 마디 되지 않았다. 여행 전에 유튜브 보면서 외운 인사말,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얼마예요. 그게 전부였다. 어떻게 조합해도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올 리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입을 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거의 러시아어 배운 지 사흘 된 어린애 수준이었을 거다. 발음은 분명히 이상했을 거고, 문법은 확신하건대 다 틀렸을 거다.

    번역기 화면을 앞에 내밀면서 뭐라고 했는지, 솔직히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난다.

    근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비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어이없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면서도 기분 좋게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영어였다.

    '아… 영어 되는구나…'

    물론 영어가 된다고 해서 상황이 완전히 편해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영어는 자연스럽고 유창했고, 나는 더듬더듬 간단한 대화 수준이었다. 영어 잘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가, 그날따라 왜 그렇게 단어가 안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긴장을 탓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대화는 이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어디서 왔는지, 러시아는 어떤지, 한국은 어떤지. 아주 평범한 스몰토크였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외국인과 카페에서 한 시간.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나는 친한 친구랑도 한 시간 내내 대화를 이어가는 게 쉽지 않은 사람인데.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과 그게 됐다는 게.

    카페에서의 대화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과 한 시간이 됐다는 게

    그녀는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다. 당시에는 잠시 일을 쉬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말투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목소리 자체가 크지 않았고, 뭔가를 설명할 때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차분함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를 존중해주는 느낌이 강했다.
    내가 어설픈 영어로 뭔가를 설명하면, 중간에 끊거나 정정하는 법 없이 끝까지 들어줬다.
    내가 번역기를 뒤지는 동안 기다려줬다.
    그 사소한 것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나는 원래 조용한 사람에게 끌리는 편이었다. 시끄럽고 자기주장이 강한 스타일보다, 말수가 적어도 깊이가 있는 사람. 그녀가 딱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그때는 미처 몰랐다. 러시아 여성들이 생각보다 자기주장이 굉장히 강하다는 걸. 그건 나중에 천천히, 아주 생생하게 알게 된다.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점점 확신이 생겼다.

    무조건 연락처 받아야 한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 대화가 끝나는 게 아까웠다. 여기서 그냥 "좋은 여행 하세요" 하고 일어서면, 이 사람을 평생 다시 못 볼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먼저 물어봤다. 연락처 받아도 되냐고.

    원래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정말로. 먼저 번호를 묻는다는 게 나한테는 굉장히 큰일이다. 머릿속으로 거절당하는 장면을 열 번쯤 시뮬레이션하다가 포기하는 게 보통이다.

    근데 그날은 이상하게 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겁보다 후회가 더 무서웠다.
    거절당하는 게 창피한 것보다,
    물어보지도 못하고 돌아서는 게 더 싫었다.

    그녀는 잠깐 머뭇거렸다. 그 몇 초가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연락처를 알려줬다.

    속으로 엄청 기뻤다. 티는 안 냈지만. 아니, 사실 조금 났을 수도 있다. 얼굴이 좀 빨개졌던 것 같기도 하다.

    스마트폰 메시지

    그렇게 우리는 연락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문자 위주였다. 영어로 쓰고, 번역기 돌리고, 어설픈 러시아어 한 마디 섞고, 그러다 문장이 이상해지면 이모티콘으로 때우고.

    지금 그 대화들을 다시 보면 웃길 정도로 엉망진창이었을 거다. 근데 신기하게, 마음은 전달됐다.

    오히려 완벽하게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더 조심스러워졌다.
    한 문장 보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됐다.
    내가 이걸 이렇게 써도 되나, 이 단어가 맞나, 혹시 이상하게 읽히진 않나.
    그러다 보니 무심코 툭 뱉는 말이 없어졌다.

    서로 오해 안 하려고 천천히, 신중하게 이야기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말이 너무 잘 통하면 오히려 쉽게 상처를 주기도 하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됐다.

    아, 나 진짜 이 여자 좋아하는구나.

    39살이 되도록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연애도 했고, 프로포즈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근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연락이 오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딱히 대단한 내용도 아닌데, 핸드폰 화면에 이름이 뜨는 것만으로 어깨가 가벼워지는 느낌. 영상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고,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게 됐다.

    멀리 떨어진 두 도시

    러시아와 한국. 지도 위에 두 점을 찍으면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

    러시아와 한국.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였다. 시차도 있었고, 언어도 달랐고,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근데 이상하게, 마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내 인생 첫 번역기 연애가 시작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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