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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화. 번역기로 연애 했습니다
    슬기로운 결혼생활 2026. 5. 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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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파고가 1위였던 시절

    말이 완벽하지 않아도 그 뒤에 있는 마음은 보였다

    내 인생에서 번역기를 가장 많이 사용했던 시기를 꼽으라면, 단연 그때다.

    파파고 사용 시간이 아마 그해 가장 높았을 거다. 앱 사용 통계가 나왔다면 1위는 무조건 번역기였을 것이고, 2위도 번역기, 3위도 번역기였을 거다.

    아침에 일어나서 번역기, 점심 먹으면서 번역기, 자기 전에 번역기.
    하루의 시작과 끝이 번역기였던 시절.

    우리는 매일 연락했다. 문자를 보내고, 영상통화를 하고, 가끔은 서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냥 웃었다. 웃음은 번역이 필요 없었다. 상대가 왜 웃는지 정확히 몰라도, 같이 웃으면 그걸로 됐다.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한 시절이었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았는데, 감정은 오히려 더 솔직했다.

    우리의 대화는 늘 섞여 있었다. 영어 반, 번역기 반, 가끔은 내가 어설프게 외운 러시아어 한 마디. 그녀는 한국어를 전혀 몰랐고, 나는 러시아어를 거의 못했다. 그나마 영어가 공통 언어였는데, 그것도 그녀가 훨씬 잘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에 리듬이 생겼다. 그녀가 영어로 뭔가 길게 설명하면, 나는 반쯤 이해하고 반쯤 번역기 돌리고. 내가 뭔가 전달하고 싶은 게 있으면, 먼저 한국어로 써보고, 번역기 돌리고, 나온 영어 문장이 이상하면 다시 고치고. 한 마디 보내는 데 5분 걸리는 일도 있었다.

    ✦ 실제 대화 재현

    "나는 오늘 기분이 good 했는데 너 생각이 many 났어."

    번역기가 만들어낸 기괴한 혼종 문장들. 지금 봐도 뭔 말인지 아리송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근데 이상하게, 그때 우리는 다 알아들었다. 말이 완벽하지 않아도 그 뒤에 있는 마음은 보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번역기 연애

    하루의 시작과 끝이 번역기였던 시절

    번역기로 대화하면서 가장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신중해졌다.

    말을 쉽게 뱉을 수 없으니까, 보내기 전에 한 번 더 읽게 됐다. 이게 상대한테 어떻게 읽힐까. 이 문장이 내가 원하는 뉘앙스로 전달될까. 번역기를 한 번 거치면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서, 특히 감정이 담긴 말일수록 더 조심하게 됐다.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사람들은 번역기로 싸우면 더 답답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을 바로 못 하니까. 근데 우리는 오히려 반대였다.

    화가 나서 번역기를 켜면, 욕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왜 화가 났는지 설명하게 된다.
    감정을 퍼붓는 게 아니라 정리해서 말하게 된다.
    번역기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했달까.

    거칠게 쏟아내려고 해도, 일단 문장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 사이에 한 번 식는 거다.

    그래서 싸워도 대부분 5분 안에 끝났다. 지금도 우리는 오해할 만한 이야기가 생기면 번역기를 같이 본다. 각자 모국어로 쓰고, 같이 번역해서 읽고, "아 이게 이런 뜻이었어?" 하고 넘어간다.

    우습지만 이게 생각보다 정확하다. 언어가 완벽할 때 오히려 더 많이 싸우는 것 같기도 하다. 말이 너무 잘 나오면, 생각보다 앞서 말이 먼저 나와버리니까.

    연애를 하면서 내 머릿속에 있던 러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연하게 상상했다. 러시아 여성들은 여성스럽고, 조용하고, 좀 신비로운 분위기일 거라고. 뭔가 영화에서 보던 이미지. 차갑고 아름답고, 말수가 적고.

    그녀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긴 했다. 그건 맞았다. 근데 동시에 굉장히 똑부러졌다.

    자기 생각이 확실했다.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줄 알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돌려 말하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냥 직접, 명확하게 이야기했다.

    처음엔 그게 좀 낯설었다. 한국에서는 서로 눈치를 많이 보지 않나. "괜찮아?" 하면 "응, 괜찮아" 하고 넘어가는데 사실은 안 괜찮은 그런 거. 나도 그런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말보다 분위기를 읽는 연애.

    그녀는 달랐다. 좋으면 좋다고 말했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오늘 기분이 별로면 별로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그 솔직함이 낯설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얼마나 편한 건지 알게 됐다.

    추측할 필요가 없었다.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그냥 말하는 대로가 다였다.

    상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이게 화난 건지 안 화난 건지, 괜찮다는 게 진짜 괜찮은 건지 아닌 건지. 그런 걸 해석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됐다. 그게 사람을 얼마나 안심시키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솔직한 대화

    추측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말하는 대로가 다였다

    반면에 질투는 상상 이상이었다. 진짜로.

    나는 처음에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했다. 반신반의했다.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신뢰가 있는데, 별거 아닌 걸로 질투하겠냐고. 완전히 틀렸다.

    한 번은 휴가 받고 러시아에 있을 때 회사 여직원과 업무적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영상통화였고, 그녀도 같이 화면을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나서 그녀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람피우는 줄 알았다고 했다.
    업무 통화라는 게 이해는 가는데,
    저 여자가 왜 저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냐고.

    진짜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데,
    나는 웃어야 할지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둘 다 했다. 해명하다가 웃음이 터졌고, 그녀도 결국 같이 웃었다. 지금은 그냥 추억이다. 그때 얘기 하면 아직도 둘이 웃는다. 근데 그때는 진짜 진지했다.

    신기했던 건, 그녀가 화를 크게 내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질투가 강하면 폭발형일 것 같은데, 그녀는 달랐다. 감정이 올라와도 대화로 풀려고 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면 속에 담아두지 않고 말로 꺼냈고, 내 이야기를 먼저 들으려고 했다.

    담아두면 곪는다는 걸.
    그 부분만큼은 그녀가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감정 대화 생각하는 남자

    감정을 그때그때 말로 꺼내는 게 오히려 건강하다는 걸 알게 됐다

    연애를 하면서 내가 가장 크게 바뀐 것도 있었다. 담배.

    나는 꽤 오래 담배를 피웠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날 만큼. 스트레스받으면 피우고, 밥 먹고 피우고, 술 마시면 더 피우고. 그냥 생활의 일부였다.

    그녀가 담배를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냄새도 싫고, 건강에 나쁜 것도 싫고, 전반적으로 다 싫다고. 근데 억지로 화내거나 강요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어느 날 조용히 말했다.

    "담배 끊었으면 좋겠어."

    딱 그 한 마디였다. 이상하게 그 말이 무겁게 들렸다. 여러 번 들어온 말이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 사람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끊었다. 쉽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손이 허전했고, 밥 먹고 나면 자동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근데 그녀한테 끊겠다고 말해버렸으니까, 어떻게든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연애하면서 담배를 끊은 게 제일 신기한 일이다.
    예전 연애에서 누가 끊으라고 해도 그냥 넘겼는데.

    사람이 사람을 바꾼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새벽 산책

    사람이 사람을 바꾼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우리는 거창한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공원 산책하고,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마트에서 장 봐서 같이 요리하고. 소소하게 시간을 보냈다. 어딘가 특별한 곳을 가거나, 뭔가 대단한 걸 하거나 그런 게 없었다.

    근데 이상하게 좋았다.

    함께 있으면 편했다. 억지로 대화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됐고,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느낌. 그런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걸 살면서 알게 됐는데, 그녀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점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과는 오래 갈 수도 있겠구나.

    오래 갈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오래 가고 싶다는 쪽으로.

    그 확신이 조금씩 무게를 더해가던 시절이었다.

    함께하는 일상

    마트에서 장 봐서 같이 요리하고, 소소하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우리 앞에 생각보다 훨씬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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