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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화. 39살 노총각, 러시아 행 비행기를 끊다
    슬기로운 결혼생활 2026. 5. 5.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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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이유도 없이
    러시아 항공권을 샀다

    서른아홉, 코로나, 그리고 카페에서 멈춰버린 숨

    2021년. 당시 나는 만으로 39살이었다. (1981년생)

    서른아홉. 숫자로 쓰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막상 그 나이가 되고 보면 묘하게 목에 걸린다.

    삼십대 끝자락.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사십대라는 낭떠러지.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 낭떠러지를 뛰어넘었다.
    결혼하고, 애 낳고, 이제는 주말마다 애 아빠 얼굴로 살고 있었다.

    단톡방 주제는 어느 순간부터 육아 아니면 아파트 얘기로 굳어졌다.

    "우리 애가 뒤집기를 드디어 했어."
    "○○ 학군 요즘 어때?"

    나는 그 대화들 사이에서 가끔 하트 이모티콘 하나 눌러주는 게 전부였다.

    나만 혼자였다.

    그렇다고 결혼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단지, 잘 안 됐다. 딱 그거였다.

    연애를 못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프로포즈 직전까지 갔던 연애도 있었다. 반지를 사러 백화점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 적도 있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웠는데, 결국 흘러가 버렸다.

    헤어지고 나서 한동안 그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그녀가 문제였나.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서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도, 함께 사는 건 또 다른 이야기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외로운 겨울 풍경

    마음 한 켠이 오래도록 무거웠던 그 시절

    마지막 연애는 2019년 겨울 끝자락에 끝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이 멈췄다.

    코로나였다.

    회사는 재택으로 바뀌었고, 약속은 취소됐고, 사람들은 각자의 집 안으로 사라졌다. 거리에서 마스크 없이 걷는 사람이 없어지던 그 시절. 세상 전체가 잠시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멈췄다.

    회사 다니고, 밥 먹고, 집에 오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영상 보다가 눈이 무거워지면 잠드는 생활.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였고, 어느 날 정신 차려보니 한 계절이 지나 있었다. 2020년이 그렇게 갔다.

    솔직히 그 시간이 내게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억지로 어딘가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생겼으니까.
    혼자인 게 티 나지 않는 세상이 됐으니까.

    하지만 그게 위안이라는 게, 사실은 더 쓸쓸한 일이었다.

    텅 빈 도시

    세상 전체가 잠시 숨을 참고 있던 2020년

    그러다 2021년이 됐다. 코로나가 잠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항공권도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러시아 직항 항공권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떴던 게.

    왜 러시아였냐고?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도. 그냥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방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이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답답했고, 머리도 식히고 싶었고,
    무엇보다 마음 한 켠이 오래도록 무거웠다.

    프로포즈 직전까지 갔던 그 연애가 끝난 뒤로, 뭔가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얹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결제 버튼을 눌렀다. 예약 완료 문자를 받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내가 러시아를 가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그냥 웃었다. 왜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웃음이 났다.

    비행기 창문 공항 출발

    별생각 없이 결제 버튼을 눌렀다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평범하다는 거였다. 뉴스에서 보던 것처럼 차갑고 무겁고 살벌한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막상 와보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했다.

    시장이 있고, 카페가 있고, 사람들이 커피 들고 걷고 있었다. 언어만 다를 뿐, 일상의 질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시아 거리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했다

    여행 며칠째 되던 날, 나는 평소처럼 카페에 들어갔다. 정말 별 이유 없었다. 다리가 좀 아팠고, 커피가 마시고 싶었고, 잠깐 앉아 쉬고 싶었다.

    나는 원래 여행 가면 카페를 자주 찾는 편이다. 이름난 관광지보다 골목 카페 한 자리가 더 좋다. 혼자 창가에 앉아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오가는 사람 구경하고, 그 도시의 공기를 멍하니 마시는 것. 그게 내 여행 방식이었다.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멈췄다.

    창가 쪽 자리에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장면이었다. 카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근데 나는 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진짜로.

    배우 앤 해서웨이를 닮은 얼굴이었다. 아니, 닮았다는 표현이 좀 부족한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화면 속 사람이 현실에 걸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는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오후 햇빛이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던 각도, 카페 안에 흐르던 잔잔한 음악, 그녀가 입고 있던 옷,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
    심지어 그 순간 코 끝에 닿던 공기 느낌까지.

    지금 생각하면, 나는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카페 창가

    그날 오후 햇빛이 창문으로 비스듬히 들어오던 각도

    보통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니다. 특히 여자에게는 더더욱. 말 한마디 꺼내기 전에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열 번쯤 돌리다가, 결국 '에이, 됐다' 하고 접는 타입이다.

    근데 그날은 달랐다.

    '지금 말 안 걸면, 평생 후회한다.'

    딱 그 생각 하나만 들었다. 논리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러시아어를 거의 못한다는 거였다. 여행 전에 인사말 몇 개 외운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 번역기를 켜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걸어갔다.

    솔직히 지금 내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설픈 러시아어 한 마디를 던졌고, 번역기 화면을 들이밀었던 것 같다. 아마 "혼자세요?" 였거나, "잠깐 옆에 앉아도 될까요?" 였거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갑자기 동양인 남자가 번역기 들고 다가왔으니까.

    근데 웃었다.
    그리고 영어로 대답해줬다.

    그렇게, 우리의 첫 대화가 시작됐다.

    두 잔의 커피

    그렇게, 우리의 첫 대화가 시작됐다

    그때는 몰랐다.

    별 이유도 없이 끊은 항공권 한 장이,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카페 한 곳이,
    용기인지 무모함인지도 모를 그 한 마디가.

    내 인생의 방향을 통째로 바꿔버릴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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