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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전쟁이 터졌다슬기로운 결혼생활 2026. 5. 6. 13:29320x100✦ Travel Essay · 2022 — 4편
전쟁이 터지고,
나는 반지를 샀다불안한 세상이 역설적으로 내 마음을 명확하게 만들어줬다
2022 · 러시아 · 프로포즈처음에는 뉴스 속 이야기 같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은 몇 달 전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스 헤드라인에 가끔 등장했고, 사람들은 "설마 진짜 전쟁까지 가겠어" 하며 넘겼다. 나도 그랬다.
국제 정세라는 게 늘 긴장됐다가 적당히 마무리되지 않나. 역사가 그랬고, 뉴스가 늘 그랬다. 위기처럼 보이다가 협상 테이블에 앉고, 어떻게든 봉합되고. 그래서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2022년 2월, 결국 터졌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아침에 눈을 떴는데 핸드폰이 난리였다. 뉴스 알림이 쏟아지고, 지인들한테 문자가 오고, 한국 가족한테도 연락이 왔다. 처음엔 기사 제목만 봤을 때 실감이 안 났다. 그냥 화면 속 활자였다. 창밖을 봐도 분위기는 다르지 않았다. 이게 전쟁하는 국가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때 내가 러시아에 있었다는 거다.
그녀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 일정이 꽤 길었고, 한동안 함께 있을 생각이었다.처음에는 뉴스 속 이야기 같았다
✦전쟁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도 처음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설마 항공편까지 막히겠어, 그 전에 뭔가 해결되겠지. 근데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바뀌었다.
유럽 항공사들이 러시아 영공 통과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결항 문자가 날아오더니, 며칠 사이에 러시아 연결 노선이 거의 사라졌다. 인천 직항은 진작 없어졌고, 경유지를 통한 노선들도 하나씩 막혔다.
앱을 열어서 항공권을 검색하면 결과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나오더라도 가격이 말도 안 됐다.
진짜 영화 같은 상황이었다.
뉴스에서만 보던 이야기들이 내 현실이 됐다.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아, 이게 국제연애구나.' 단순히 외국인과 연애하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 전쟁, 국경, 항공 제한, 비자. 이런 것들이 갑자기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연애가 두 사람의 마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만큼 실감한 적이 없었다. 솔직히 좀 막막했다.
앱을 열어서 항공권을 검색하면 결과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러시아 국내선을 타고 노보시비르스크까지 이동했다. 노보시비르스크.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도시다.
✦ 귀국 경로러시아 → 노보시비르스크 → 두바이 → 이스탄불 → 인천지구를 반 바퀴 돈 셈이었다. 원래라면 몇 시간이면 됐을 거리를, 며칠에 걸쳐 빙빙 돌아서 왔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 경유지에서 다시 체크인하는 시간, 좌석 없는 대기실에서 다음 편을 기다리는 시간. 몸은 탈진 직전이었다.
하지만 몸보다 머릿속이 더 복잡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야 하지.비행기 안에서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40살 한국 남자가 러시아 여자 만나러 갔다가, 전쟁 때문에 지구 반 바퀴 돌아서 집에 오고 있다. 누가 들으면 드라마 대본 같을 거다. 근데 이게 내 현실이었다.
원래라면 몇 시간이면 됐을 거리를, 며칠에 걸쳐 빙빙 돌아서 왔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러시아 직항은 사라졌고, 경유해서 들어가는 방법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여러 경로를 알아보다가 결국 찾은 방법이 몽골 경유였다.
✦ 러시아 입국 경로인천 → 울란바토르 → 울란우데 → 하바로프스크처음에 이 방법을 알게 됐을 때 잠깐 멍했다. 몽골을 거쳐서 러시아를 가는 경로가 지금 내게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라는 게. 지도 앱을 켜서 경로를 보는데, 선이 너무 멀리 돌아가고 있었다. 이 방법으로 러시아에 5번 쯤 방문했을 때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직항 페리(선박)도 생기게 되었다.
전쟁.... 그래도 갔다.
몽골 공항에서 갈아타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나 지금 뭐 하는 건가. 근데 이상하게 그 생각 뒤에 바로 다른 생각이 따라왔다. 그래도 가야지. 당연하게.
그때 진짜 실감했다. 아, 나 진짜 국제연애 하는구나.
멀어졌다. 물리적으로는 확실히.
근데 신기한 건, 마음은 반대였다.
멀어질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이게 말이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그랬다.몽골 공항에서 갈아타는 동안 생각했다 — 그래도 가야지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차분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솔직히 많이 불안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우리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건지, 현실적인 걱정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녀도 불안했을 거다. 자기 나라가 전쟁 상태인데. 그 이야기가 매일 뉴스에 나오는데.
근데 그녀는 내 감정을 먼저 챙겼다.
"너 많이 무섭지?"자기가 더 힘든 상황인데, 내 감정을 먼저 물어봤다. 그 순간 뭔가가 울컥했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그냥 가슴 어딘가가 묵직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점점 확신하게 됐다.
아, 이 사람 놓치면 후회하겠다.
막연한 감정이 아니었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확신이었다.
이 상황에서, 이 거리에서, 이 복잡함 속에서도,
이 사람이 곁에 있으면 괜찮겠다는 느낌.살면서 그런 확신이 드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나.
자기가 더 힘든 상황인데, 내 감정을 먼저 물어봤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현실이었다. 감정만으로 결혼을 결심한 게 아니었다. 감정은 이미 충분했다. 결정을 앞당긴 건 상황이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몽골 경유도 언제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비자 상황도, 항공편 상황도, 모든 게 유동적이었다. 오늘은 되는 게 내일은 안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결혼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원래도 결혼 생각은 있었다. 오래전부터.
전쟁은 그 결심을 더 빠르게 만들었을 뿐이다.더 늦기 전에 하자.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는 감정과, 지금 해야만 한다는 현실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사람은 움직이게 돼 있다.
✦나는 반지를 샀다. 꽃도 샀다.
어떤 꽃을 사야 할지 몰라서 한참 고민했다. 러시아에서는 꽃 선물 문화가 한국보다 훨씬 일상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장미 한 다발로 가자, 싶었다가, 아니 이왕이면 더 신경 쓰자, 싶었다가. 꽃집 앞에서 꽤 오래 서 있었다.
결국 흰 장미와 다른 꽃들을 섞어서 만든 부케로 정했다. 반지는 손에 쥐고, 꽃은 팔에 안고,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솔직히 그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백지가 됐다.
한국어로도 어렵고, 영어로도 어렵고, 러시아어는 더더욱 어렵고.
결국 준비했던 말들이 다 날아가버리고,
그냥 눈을 보면서 말했다.Will you marry me?
러시아 · 2022반지는 손에 쥐고, 꽃은 팔에 안고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시절이었다.
세상은 가장 불안한 시기였는데,
내 마음은 가장 확실한 시기였다.
흔들리는 것들이 많을수록,
흔들리지 않는 것 하나가 더 선명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녀가 내게 그랬다.#러시아여행 #여행에세이 #국제연애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 #프로포즈 #2022 #장거리연애320x100'슬기로운 결혼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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